-2- 레드문

그만한 워밍업에도 불구하고 바깥세상은 어지럽다. 소음은 소음대로 시끄럽고 공기는 너무도 탁해서 가래침을 몇번이나 내 뱉어야 시원했다. 태양은 스탠드 보다 크고 넓었으며 뜨거웠다. 다행이 쌀쌀한 바람 때문에 쉽게 식어버렸다.
포스트 잇에 다소곳이 적어놓은 레드문을 찾기위해서 한참을 헤메이다가 사람들 옷깃에 채이고 차에 치일뻔했다. 늙은 탓일까 세상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적응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 같다.
레드문은 조금 핝거한 곳에 있었다. 여러갈래로 갈라진 복잡한 전선들을 따라 고층 건물에서 멀어지다 보면 낮은 언덕과 도로 사이에 레드문 간판이 보인다. 들어가는 방법도 간단하다. 문사이에 틈이 넓기 때문에 충분히 빠져 나갈 수 있다. 다만 3층까지 올라가는데 수고 스러움만 감수한다면 그곳에서 포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레드문은 한가 한 곳이다. 유러피안 재즈가 들렸고 몇몇 사람들은 지극히 조용했다. 창문은 크고 투명했고 블루와 레드가 섞인 인테리어가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참치 샌드위치 냄새에 신경을 쓰다보니 금새 적응되었다. 냄새 따라가기는 내 특기다. 단순한 설계의 레드문으로서는 식은 죽 먹기로 찾아내었다. 반쯤 먹다남은 샌드위치에 참치 덩어리 하나가접시에 떨어져 있었다. 먹음직 스러운 음식에 다가가 보니 그가 앉아있었다.
‘지브리’ 라고 적혀있는 오랜지색 야구모자에 흰색 티를 입고 아르키메데스를 펼쳐들고 있었다. 더블에스프레소는 식은지 얼마 안돼는지 아직도 온기가 느껴졌다. 그가 아르키메데스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참치를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참치특유의 향과 맛까지 느낄 수 있게 긴 시간 동안 참치조각을 음미했다. 한참이 지난후에 배가 부른 탓일까 조금 쉬고 싶어졌다. 나는 그의 지브리 야구 모자위에 살짝 앉았다. 레드문은 네시간째 그를 허락하고 있었다.
더블에스프레서 2000원 참치샌드위치 4000원 마치 그의 자리는 이미 네시간째 이어지는 6000원 짜리 오페라의 객석이 되어 버렸다. 벌써 세번째 책을 바꿔들었다. 손님이 없어 따분한듯 레드문 웨이트리스는 그에게 말이라도 걸고 싶어했다. 6000원 짜리 D급 객석은 이미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길거리의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고 레드문의 조명도 한층 환한 느낌이다. 오디오 트랙은 이사오 사사키의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죄송합니다. 재채기가 심해지네요”
그는 자신의 재채기가 웨이트리스 탓인 것처럼 냉담했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여자 알레르기라고 하는 희귀한 병을 앓고 있었다.
“어머! 죄송해요 단지 얘기를 좀 하고 싶었을 뿐인데… 벌써 네 시간쨰예요 물론 빨리 나가달라는 얘기는 아니예요 오늘은 손님이 많이 없어 한가하네요”
웨이트리스는 멀치감치 어정쩡하게 서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마침 그는 책 읽는 것이 실증이 난 것 같았다. 보던 책을 덥어놓고 웨이트리스와의 대화에 동참했다.
“직업같은게 있으신가요? 프리랜서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는 자신을 무료한 시간과 심심한 지루함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하긴 정말 심심할 정도의 삶 자체에서 어떻게 그걸 견디며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긴 하다.
“그렇다고 철학 같은 것을 공부하는 건 아니고, 프리랜서 비슷하다고만 해두죠 어쩌면 제 인생에 반성하기도 하는 죄인이 될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성직자가 될 수도 있겠군요, 혹시 니체를 하시나요? 저는 차라투스투라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죠”
웨이트리스는 차라투스투라 가 누군지 몰랐다. 남자는 연신 재채기를 해댔고, 마침 붉게 물든 코가 불쌍해 보였다.
“알레르기라고 했나요? 뭐였죠? 여자 알레르기? 뭐가 문제죠?”
“여자알레르기, 아주 지독한 알레르기죠 여자만 보면 심해져요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어요 심할때는 몸에 두드러기도 나고 심하게는 기절도 한적이 있어요 병원에 가봐도 뚜렷한 처방을 기대하기란 어려워요 주는 약을 먹거나 심리 치료를 받아봐도 대인 기피증 같은 건 아니라는데 그런 말들은 믿지 않아요 더군다나 나는 지금까지 이 알레르기 때문에 더 잘 살고 있어요 물론 이해할 수 없겠지만 깨달은 점이 많다고 해야할까요 어쨌든 여자알레르기라고 여자에 대한 편견 같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좀더 철학적인 뭔가가 있어요 어쩌면 정신적인 것일 수 도 있겠군요.”
그는 정신적인 에너지는 에로스적 본능과 타나토스적인 본능으로 나뉜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알레르기에 대해서 합리화 하려고 했다.
“에로스적 본능은 생명유지와 관련되어 있어요 즉 자신을 보존하고 싶은 욕망을 뜻하죠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타나토스적 본능인데 이것은 모든 생명을 파괴시키려는 본능이예요 따라서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변화되는 거라고 보는거죠”
그렇다면 그 에로스적인지 뭔지 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는 것인가? 마치 코엘료 소설 베로니카를 연상시키는 듯 했다. 그는 가끔씩 내가 거슬리는지 허공에 손을 휘두른 다음에야 이야기를 이어갔다. 웨이트리스가 이야기에 집중할수록 그에게 몸이 다가왔다. 그때마다 남자는 재채기를 연발했지만 이야기는 중단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아요 다만 귀찮을 뿐이죠 특이한 알레르기 때문에 오해도 많았어요 학교다닐때는 그게 유전적인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태어날 때 부모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믿게 된거죠 아마도 아버지가 심한 여자 알레르기 였을 거예요 제가 태어난 것을 가끔 의심할 때가 많아요.”
최근 수십년간 그를 보며 느낀 거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용기가 부족해서 시행착오를 격게된다. 몇 번의 실패는 도전의욕을 상실시키게 되고 그게 보통 사람들의 심리란 걸 알았다. 인간의 인생에는 특별성도 차별성도 그리고 상대성도 없었다. 단지 그저 시간에 길들여진 망각의 행동과 움직임 뿐, 변화를 두려워하고 기다림에 화를 내며 견디기 힘들어 하는 아주 본능적인 기질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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